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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금강의 역사와 민속 조회수 : 416
등록일 2011-04-27 09:20:57 작성자 류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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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금강의 역사와 민속

작년 여름 4대강 살리기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부여읍 구교리 일대의 금강 변 충적지대를 발굴조사 하던 중에 부여 규암나루의 도선(渡船)시설을 발견하게 되었다. 발견된 시설물은 전봇대 크기의 목제 기둥들을 목교의 하부 구조와 같은 방식으로 강변에 촘촘하게 박아서 만든 것으로서, 1934년 7월에 배다리가 설치되기 전까지 사람과 차량을 실어 나르던 나룻배를 대던 나루터의 구조물로 확인되었다. 이 규암나루의 도선시설은 비록 남은 상태도 완전하지 못하고, 만든 시기도 근대 이후의 것이어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4대강 공사지역 중에서 처음으로 드러난 나루터의 구체적인 시설물이면서 규암나루의 위치와 존재를 증명해주는 실물자료라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규암나루는 금강의 주요 나루 중 하나로서 규암(窺岩)은 '엿바위'와 같은 말이다. 백제시대에 이곳에서 당나라 군사의 침공을 엿보던 병사가 사비성에 알렸다는 이야기에서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엿바위'를 자온대(自溫臺)라고도 하는데 여기에 얽힌 유명한 백제시대의 설화가 삼국유사에 전해져 오고 있다. 한편, 조선시대 충청도읍지의 기록에 의하면 규암나루에는 해창(海倉)이 있었다하며, 그 규모에 비추어 규암포구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금강유역 일대에는 이렇게 규모가 큰 포구와 좀 더 작은 나루 수십 곳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과 같이 육상 교통시설이 발달한 시대에는 비할 바 못 되지만, 근대 이전 시기까지 강은 가장 중요한 물자의 유통로였으며 그 중간마다 위치한 포구와 나루는 그 지역 경제 교역의 중심지로서 기능하였다.

1990년에 금강하구둑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서해의 밀물이 부여 인근까지 영향을 주었으며, 이를 이용해 바닷배가 내륙 깊숙한 곳까지 왕래할 수 있었다. 수심이 얕아져 바닷배가 올라가기 어려운 상류는 바닷배 보다 폭이 좁고 긴 강배가 운항하였다. 조수의 영향이 미치는 구간을 경계로 물 아래(水下)와 물 위(水上)로 구분하는데, 금강의 하류와 중류도 이를 기준으로 구분하고 있다. 강배로도 운항이 어려워 소형 선박을 이용하는 곳부터는 상류로 구분된다. 이러한 자연환경의 영향 때문에 금강 하류에는 400석 정도를 실어 나를 수 있는 바닷배가 왕래하던 나포, 웅포, 입포, 강경포와 같은 규모가 큰 포구들이 형성되었다. 강경포구는 해상수운과 내륙수운의 결절지(結節地)로서 크게 부흥하였으며, 여기서 100~200석 규모의 강배 또는 '짐배'로 옮겨진 물자들은 규암포구와 왕진, 반포, 웅진나루 등을 거쳐 청원군 부강의 합강리에 도착하였고, 이곳에서 금강 상류의 지천과 육상 운송로 등을 통해 내륙 깊숙한 곳까지 물자가 유통되었다.

이러한 금강 일대의 포구와 나루에는 각종 농산물과 공산품이 집적되고 활발하게 거래가 이루어지면서 자연스레 큰 마을과 시장이 형성되었다. 우리의 전통적인 농촌사회에서 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컸는데, 시장은 인구의 유입을 촉진하고 정보를 교류하며, 교역과 화폐경제의 발달, 외부 문화의 접촉 창구로서의 기능 등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장이 새로 서거나 장소를 옮겼을 때는 이를 주민에게 알리기 위해 난장(場)판을 벌이는데, 이때는 씨름, 줄다리기, 윷놀이, 남사당패놀이 등과 같은 온갖 민속행사들이 펼쳐졌으며, 산신, 용왕신 등에 대한 제사가 행해지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시장은 살아 있는 민속문화의 보고(寶庫)로서 중요한 사회·문화적 기능이 있었다.

충청내륙의 천 리 물길을 굽이쳐 흐르는 금강에는 그 굽이굽이마다 우리의 오랜 역사와 전통, 민속, 지명, 설화를 간직한 소중한 문화자원들이 산재해 있지만, 지금은 금강이 내재하고 있는 참다운 모습을 찾아보기가 더욱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금강의 역사와 민속에 대한 내용은 그동안 개괄적으로 이루어진 연구의 일부일 뿐이며, 구체적이고 자세한 연구가 수반되지 못하여 대단히 미흡한 상태이다. 안타까운 마음에 조금이나마 기록으로 남기려고 방문한 강변 포구의 노인들은 이미 작고하셨거나 대부분 팔순 고령을 넘긴 상태이고, 기억마저도 희미해져서 제대로 말씀을 전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지금과 같이 대규모 개발에 모든 국력이 집중되고, 그에 따라 자연적·인문적 환경이 급속히 변해간다면 더는 금강의 옛 모습 찾기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충청문화의 발원지이자 모태(母胎)인 금강의 역사를 제대로 밝히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첫걸음으로서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그 일이 지금은 무엇보다도 시급한 상황이 되었다.


중도일보 칼럼, 중도프리즘, 2011. 4. 21.
금강문화유산연구원장 류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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